작은 숫자 탐험 | 찰나에서 퀘크토까지, 미시 세계의 비밀


우리는 흔히 ‘억’ 소리 나는 큰 숫자에 압도되곤 합니다. 하지만 우리 발밑, 그리고 세포보다 더 깊은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‘작은 숫자들의 우주’가 존재합니다. 0을 향해 끝없이 수렴하는 이 숫자의 세계는 현대 과학의 정밀함과 동양 철학의 ‘공(空)’ 사상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.

일상의 영역: 보이고 느껴지는 미세함

작은 숫자
작은 숫자

[한눈에 정리하는 작은 숫자 표]

지수소수점(숫자)한국어 (한자명칭)SI 접두어기호영어 숫자 (알파벳)의미 및 비유
10⁻¹0.1분/푼(分)DecidTenth10분의 1 / 이자(부), 7부 바지
10⁻²0.01리(厘)CenticHundredth100분의 1 (1cm)
10⁻³0.001모(毛)/毫(호)MillimThousandth1,000분의 1 (1mm)
10⁻⁴10⁻⁴사(絲)Ten-thousandth아주 가는 실 한 가닥
10⁻⁵10⁻⁵홀(忽)Hundred-thousandth매우 짧은 시간 (갑자기)
10⁻⁶10⁻⁶미(微)MicroμMillionth미세함 (현미경의 세계)
10⁻⁷10⁻⁷섬(纖)Ten-millionth아주 가냘프고 가느다람
10⁻⁸10⁻⁸사(沙)Hundred-millionth모래알 한 알
10⁻⁹10⁻⁹진(塵)NanonBillionth티끌 (나노 기술 영역)
10⁻¹⁰10⁻¹⁰애(埃)Ten-billionth먼지 티끌
10⁻¹¹10⁻¹¹묘(渺)Hundred-billionth아득히 작음
10⁻¹²10⁻¹²막(漠)PicopTrillionth사막처럼 아득함 (분자의 세계)
10⁻¹³10⁻¹³모호(模糊)Ten-trillionth형체조차 희미함
10⁻¹⁴10⁻¹⁴준순(逡巡)Hundred-trillionth뒷걸음질 (매우 짧은 시간)
10⁻¹⁵10⁻¹⁵수유(須臾)FemtofQuadrillionth잠시, 잠깐 사이
10⁻¹⁶10⁻¹⁶순식(瞬息)Ten-quadrillionth눈 깜빡이고 숨 쉬는 사이
10⁻¹⁷10⁻¹⁷탄지(彈指)Hundred-quadrillionth손가락을 튕기는 사이
10⁻¹⁸10⁻¹⁸찰나(刹那)AttoaQuintillionth모든 것이 생멸하는 짧은 순간
10⁻¹⁹10⁻¹¹육덕(六德)Ten-quintillionth불교적 근원 숫자
10⁻²⁰10⁻²⁰공허(空虛)Hundred-quintillionth텅 비어 있음
10⁻²¹10⁻²¹청정(淸淨)ZeptozSextillionth맑고 깨끗하여 아무것도 없음
10⁻²²10⁻²²아라야(阿賴耶)Ten-sextillionth인간의 근본 의식 (아뢰야식)
10⁻²³10⁻²³아마라(阿摩羅)Hundred-sextillionth티 없이 맑고 순수함
10⁻²⁴10⁻²⁴열반적정(涅槃寂靜)YoctoySeptillionth모든 번뇌가 사라진 평온한 끝
10⁻²⁷10⁻²⁷RontorOctillionth2022년 신설 단위
10⁻³⁰10⁻³⁰QuectoqNonillionth인류가 정의한 가장 작은
작은 숫자

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듣는 미세 단위는 단연 야구 중계에서의 할·푼·리입니다.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. 우리가 흔히 쓰는 야구식 계산법은 원래의 정통 수 체계와는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입니다.(1/10씩 작아요)

① 야구에서의 할·푼·리: 할(10%)이 기준이다

보통 숫자 1을 100%로 보았을 때, 야구에서의 할(割)은 10%(0.1)에서 시작합니다.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푼과 리를 계산하는 기준입니다. 일본에서 유래한 방식입니다.

  • 할(割): 기준점인 0.1 (10%)
  • 푼(分): 할의 1/10인 0.01 (1%)
  • 리(厘): 할의 1/100인 0.001 (0.1%)

예를 들어, 중계화면에 0.285라고 표기되는 타자는 2할 8푼 5리라고 읽습니다. 즉, 전체 1을 기준으로 할부터 차례대로 소수점 자리를 채워나가는 방식입니다.

사실 전통적인 명수법에서 분(分)은 1/10을, 리(厘)는 1/100을 의미합니다. 즉, 원래대로라면 1분(푼)이 0.1이 되어야 맞습니다. 하지만 일본에서 유래하여 정착된 야구식 표현에서는 할(10%)을 가장 큰 단위로 설정했습니다. 그러다 보니 그 하위 단위인 분(푼)과 리가 각각 할의 1/10, 1/100로 밀려나면서 푼=0.01, 리=0.001이라는 야구만의 독특한 단위 체계가 완성된 것입니다.

생활 속에 숨어있는 비율의 미학

이 방식은 야구뿐만 아니라 금융과 패션에서도 우리 식대로 변형되어 쓰이곤 합니다.

  • 이자율의 부(分): 이자율을 말할 때 2부 이자라고 하면, 야구의 할처럼 10분의 1(10%)을 기준으로 삼아 20%를 뜻하게 됩니다.
  • 패션의 부(分): 7부 바지 역시 전체 길이를 10으로 보았을 때 70%의 길이를 의미합니다. 9부 바지는 90%, 5부 바지는 50%인 셈이죠.

과학의 영역: 눈을 넘어 현미경의 세계로

본격적으로 인간의 감각을 벗어나 정밀 측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. 여기서부터는 현대 과학의 SI 접두어와 전통 한자어의 이름이 흥미롭게 교차합니다.

  • 미(微, Micro): 10⁻⁶입니다.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세(微細)하다는 표현의 주인공입니다. 미세먼지의 크기를 재는 마이크로미터(μm) 단위이며, 머리카락 굵기를 100등분 한 정도의 아주 작은 크기입니다.
  • 진(塵, Nano): 10⁻⁹입니다. 한자어 진(塵)은 티끌이나 먼지를 뜻합니다. 현대 기술의 꽃이라 불리는 나노 공정이 바로 이 티끌보다 작은 세계에서 원자를 제어하는 기술입니다. 동양의 ‘티끌’이 현대 첨단 기술의 상징이 된 셈이죠.
  • 막(漠, Pico): 10⁻¹²입니다. 이십체석 명수법에 따르면 10⁻¹²막(漠)이라 부릅니다. 이는 사막이나 아득함을 뜻하는데, 현대 과학의 피코(Pico) 단위와 일치합니다. 이제 숫자는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아득해져 분자들 사이의 거리를 논하는 단계에 진입합니다.

찰나의 영역: 시간조차 멈춰버린 극미(極微)

작은 숫자
작은 숫자

이 단계의 숫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‘크기’를 넘어, 찰나의 시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합니다.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‘잠시’가 현대 물리학에서는 얼마나 경이로운 속도인지 알 수 있는 구간입니다.

  • 수유(須臾, Femto): 10⁻¹⁵입니다. 현대 과학의 펨토(Femto)와 일치합니다. 원자핵의 크기를 다루거나 아주 빠른 레이저의 속도를 측정할 때 사용되는 단위죠. 불교에서는 ‘잠시 동안’을 뜻하지만, 빛이 원자 하나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극도로 짧은 순간입니다.
  • 순식(瞬息): 10⁻¹⁶입니다. 눈을 한 번 깜빡이고() 숨을 한 번 쉬는() 사이라는 뜻입니다. 우리가 “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”라고 말할 때, 그 속도는 소수점 아래 16번째 자리라는 어마어마한 정밀함을 담고 있습니다.
  • 탄지(彈指): 10⁻¹⁷입니다.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(彈指) 짧은 순간을 의미합니다. 무언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는 아주 짧은 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.
  • 찰나(刹那, Atto): 10⁻¹⁸입니다. 현대 과학의 아토(Atto) 단위와 매칭됩니다.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근원적인 시간을 뜻하며, 2023년 노벨 물리학상이 바로 이 아토초(Attosecond) 영역의 전자를 관측한 연구에 수여되었을 만큼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있는 단위입니다.

우주의 근원: 무(無)에 수렴하는 현대 물리학

2022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새롭게 정의된 단위들을 포함한, 인류가 측정 가능한 극한의 영역입니다.

  • 청정(淸淨): 한자 문화권에서 숫자로 부르는 거의 마지막 단계(10⁻²¹)입니다. 현대 과학의 셉토(Zepto)와 맞닿아 있습니다.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맑고 깨끗해진 상태, 즉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‘공(空)’의 상태를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. 실제로 이 단계는 우주 공간에 떠도는 입자들의 극미한 에너지를 다루는 수준입니다.
  • 론토(Ronto) & 퀘크토(Quecto): 각각 10⁻²⁷10⁻³⁰을 뜻합니다. 2022년에 공식 채택된 단위로, 전자 하나가 가진 아주 미세한 질량을 측정하거나 우주의 배경 복사를 연구할 때 사용됩니다.
    • 론토(r): 전자 하나가 가진 아주 미세한 질량을 측정할 때 사용됩니다.
    • 퀘크토(q): 현재 인류가 이름을 붙인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. 소수점 아래 0이 무려 29개나 붙는 이 영역은 우주의 배경 복사 에너지를 연구하거나 데이터의 극미한 손실률을 따질 때 등장합니다.

왜 우리는 작은 숫자에 이름을 붙였을까?

거대한 숫자가 ‘우주의 팽창’을 설명한다면, 작은 숫자는 ‘존재의 본질’을 설명합니다. 동양인들이 미세한 숫자에 ‘순식’, ‘찰나’, ‘청정’ 같은 이름을 붙인 이유는, 아무리 작고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우주의 섭리가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.

오늘 여러분의 하루 중 ‘순식간’에 지나간 그 짧은 찰나가 사실은 10⁻¹⁹이라는 거대한 깊이를 가진 시간이었음을 생각해보면, 일상의 매 순간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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